플로리 에반스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교회는 생명과 같은 존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사람으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교인인 사람이 예배하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교회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을 순교자의 반열에 망설임 없이 올려놓는 것은 교회는 성도에게 생명과 같기 때문입니다. 교회관은 종교적으로 만들어낸 교리가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교회의 청사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청사진은 급조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시작부터 존재해 온 것입니다. 물론 교회라는 말은 없었지만 교회가 가지고 있는 특성은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전 구약 시대에 존재해 왔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구약시대를 광야 교회라 칭하는 일에 망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행7:38)
장로교의 근간을 이룬 존 칼빈(John Calvin 1509 – 1564, 스위스) 목사님도 교회를 지칭할 때 어머니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것처럼 어머니 역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를 일컬어 교회라 칭한 것입니다. 이는 칼빈의 주장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확대해석했을 뿐입니다. (갈4:26) 인간사의 구조가 아버지에게로 나아가는 가장 쉬운 수단은 어머니의 문을 통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노함이 어머니를 통하여 수그러들고, 아버지에게 간청해야 할 일은 어머니를 통하여 쉽게 전달되는 것은 보편적인 가정이 가지는 모습입니다. 그와 같이 교회의 모습은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전달 받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문으로서의 어머니라 칭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에게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어디 가든,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 교회를 세우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게 되며, 보이는 예배당인 교회를 세울 수 없다면 그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예배하는 일을 하는 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자연 반사적으로 일어나는 영적 반응인 것입니다. 그렇게 세워진 교회들이 골짜기 마다 존재했으며,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의구심을 품는 첩첩 산중일지라도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공간인 교회가 세워져 있게 됩니다. 물론 아직도 세계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곳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교회가 가는 곳 마다 세워져 있다는 것은 말씀이 흥황 하여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진리의 말씀이 세상을 덮으리라는 말씀이 응해지고 있음을 목도하게 됩니다. (합2:14)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은 곧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일치했습니다. 이는 전통적 교회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를 세울 수 없는 곳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표출해 낼 수 있습니다. 현대 신앙은 탈교회시대의 문을 몇 걸음 넘어선 듯합니다. 교회에 대한 순결한 마음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미 무너져 그 잔재만이 존재하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옛 터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입니다. 그 존재하심의 위엄 앞에 무릎 꿇고 고백을 하고 경배하는 것이 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의도입니다. 교회가 무너졌다는 것은 교회 건물 자체의 무너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구름이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는 통곡해야 할 사건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지 않은 교회는 더 이상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그곳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고, 목회자와 성도가 있으며, 교회를 장식하는 성물들이 있어서 누가 봐도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지만 더 이상 그곳을 교회라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위조지폐와 같은 것입니다. 교회의 모습은 있으나 실상은 돈의 가치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떠난 교회는 교회 모양을 한 건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만 있을 뿐이지 능력을 상실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딤후3:5)
그렇게 영국의 교회들이 무너져가고 있음에 통곡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물론 건물은 수백 년, 아니 그 이상 더 버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웨일즈의 부흥의 시발점이 되었던 ‘플로리 에반스’(Florey Evans)를 만나기 위해 수년간 계획을 세웠습니다. 관광하듯 휙 하니 둘러 볼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녀를 만난다는 것, 그녀의 흔적을 되짚어 본다는 것은 내가 가진 신앙의 근간을 되짚어 봐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일 것입니다. 런던에서 에반스가 고백했던 교회인 ‘타버나클’(Tabernacle)이 있는 마을인 뉴키(New Quay) 까지는 4 – 5시간 걸리는 거리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갈 수 있는 거리지만 그곳에서 전해 받을 중압감 있는 메시지가 두려워 몇 해를 미루게 됩니다.
어느 따스한 봄날 존경하는 지인 목사님들과 함께 플로리 에반스를 만나러 갑니다. 폴로리를 생각하면 우리나라의 유관순 누나가 생각 납니다. 그래서 플로리 에반스를 누나라 부르게 됩니다. 플로리 역시 미혼으로 살다 최후를 맞게 됩니다. 유관순누나와 같은 시기의 사람입니다. 유관순 누가가 1902에 태어나 1919년 방년 17세의 나이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중무장한 일본의 총칼 앞에 혈혈단신으로 태극기를 흔들던 가녀린 소녀에게서 뿜어져 나온 조국에 대한 사랑이 일본을 벌벌 떨게 했을 것입니다. 플로리는 유관순 보다는 16년 빨리 태어났습니다. 1886년에 태어나 1903년에 그녀 나이 17세에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을 기점으로 웨일즈 부흥의 시발점을 삼으신 것입니다.
유관순 누나 17세의 나이, 플로리 누나 역시 17세 나이에 자기 인생이 그을 수 있는 시대적 획을 그었던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두 사람은 독립과 부흥이라는 다른 차원에서 쓰임 받았던 인물이지만 독립정신 역시 기독교 신앙위에 세워진 것으로 해석한다면 두 사람의 외침과 고백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고백이었으며 그것을 통하여 민족을 바꾸는 출발점이 된 것은 분명합니다. 유관순은 한국에서 일본을 몰아내는 독립의 불을 지폈다면 플로리는 웨일즈에서 불신앙의 영을 몰아내 성령이 임재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한 통로가 된 것입니다.
플로리 에반스는 누군가에게 이끌려 교회에 일원이 됩니다. 웨일즈 한 모퉁이의 작은 어촌 마을에서 태어나 성장했기에 배움도 많지 않았으며, 심한 바닷바람을 이겨내기 위해 볼은 붉은 홍조와 태양에 그을린 까무잡잡하면서 투박한 웨일즈 말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타버나클 교회를 안내해준 ‘존즌스’ 할머니를 보니 마치 플로리 에반스를 만나는 것과 같은 감흥을 받게 됩니다. 그녀의 굽은 등, 보조 장치에 의지하여 힘겹게 언덕을 오르는 뒷모습은 마치 교회의 현실 온도를 설명해 주는 안내 표시판과 같이 느껴집니다.
바람이 불어옵니다. 교회 앞 언덕에 서서 펼쳐지는 어촌 마을의 작은 항구를 내려다봅니다. 플로리도 예배를 마치고 이곳에 서서 바다를 내려다 봤겠지요. 자신의 고백이 교회를 넘어서서 웨일즈를 불태우고 지구촌을 넘치게 하는 물이 바다 덮음 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라는 생각을 감히 할 수 없었겠지요? 세상에 지혜로운 자들과 학식이 높은 자들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작은 어촌마을에서 이름도 없는 한 소녀의 고백이 세상을 뒤 흔들게 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금 사모하게 됩니다.
유관순 누나의 단순한 외침인 ‘대한독립만세’가 조국에 독립을 가져온 것처럼, 플로리 에반스 누나의 고백인 “온 맘 다해 주님을 사랑합니다.” (I love Jesus with all my heart) 이 단순한 고백이 번제가 되게 하셔서 웨일즈를 뛰어 넘어 미국과 인도, 한국에 까지 부흥의 시발점의 파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고백을 잃은 타버나클이여, 이 땅에 무너져 가는 교회여, 단순하게 외쳤던 유관순은 나라사랑의 정신은 어디에 있으며, 플로리 에반스의 순결한 신앙고백은 어디에 있는가? 타버나클 교회 앞에서 목 놓아 울게 됩니다
<예수마을커뮤니티교회 박심원 목사 seemwo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