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이 땅에 세워진 하늘기관입니다. 이 단순한 진리에 사람들은 반기를 들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이 질문에 많은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하늘기관이면 하늘기관으로의 향기가 나야하지 않을까? 그 향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하는 책임감 때문입니다. 다른 교회를 이야기함이 아니라 내가 몸담고 땀 흘려 목양하고 있는 교회를 모델삼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다소 비판적으로 느껴지는 글을 쓰는 것은 교회를 비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숨기고 싶은 비밀의 옷을 벗어 던지고 스스로에게 건강검진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건강검진을 하는 이유는 판단이나 비판의 목적이 아니라 약함을 치유 받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저는 교회는 이 땅에 세워진 하늘기관이라 믿고 있습니다. 증거가 무엇인가? 물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 말고 그 말씀이 사실임을 확증할 수 있는 검증을 요구한다면 내가 몸답고 있는 교회가 그 증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거룩해서가 아닙니다. 세상에 내놓을 만한 위대한 영적인 업적이나, 사회적 봉사활동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매 예배시간 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마치 마가다락방에서 성령의 임재하심을 경험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황홀한 영광의 광채가 예배당을 감싸고 그 안에서 예배하는 자들이 천상을 경험하는 황홀한 영적인 체험을 해서도 아닙니다.
내 인생이 몸담고 있는 교회는 능력이 없습니다. 교회 담장 밖으로 내보낼만한 모범적인 것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목사인 저는 설교를 잘하는 것도 아니며, 세상을 품을 만큼 인격적이지도 못합니다. 화려한 스펙을 자랑할 것이 없는 무능력하여 기도하기 위해서, 설교한편을 위해서 몇 날의 밤을 지세 워야 하는 지극히 평범한 목사일 뿐입니다. 교회의 멤버 역시 지극히 평범한 이주민입니다. 어떤 이는 비자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고 있으며, 집이 없어서 매년 이사 준비를 해야 하는 가족들도 있습니다. 남들은 쉽게 들어가는 대학의 문을 열기 위해 온 성도가 울며 기도해야 할 수준입니다. 주일 예배 시간에 연주되는 합주에 전문 음악인라면 낼 수 없는 잡음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새벽예배는 두 세 겹씩 옷을 껴입어야 할 만큼 춥습니다.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고, 자랑할 것이 없는 지극히 빈약한 교회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이 몸담고 있는 교회는 분명 이 땅에 세워진 하늘기관이라 큰 소리로 외칠 수 있습니다. 마치 다윗이 아둘람 동굴에 숨어 있을 때 그를 찾아온 400명의 사람들과 같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을 피해서 적진인 블레셋 가드로 숨어들게 됩니다. 가드는 다윗이 죽인 골리앗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그곳 사람들은 다윗의 출현으로 긴장을 합니다. 당연 그의 소식은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보고 됩니다. 아기스는 다윗을 부릅니다. 정치적으로 위협이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아기스 앞에 선다는 것은 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위기상황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수염에 침을 흘리며, 문짝에 자신의 몸을 긁으며, 마치 미친 사람처럼 행동을 합니다. 아기스는 분노합니다. 미친 사람을 이 땅에 내어 쫓으라 합니다. 다윗은 그렇게 도망하여 숨은 곳이 바로 아둘람 동굴입니다.
낮아진 자존감, 절망의 나락에 떨어져 있는 다윗, 그 좁은 아둘람 동굴로 다윗의 소식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 결 같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실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삼상22:1-2) 다윗은 실패한 사람들의 지도자가 됩니다. 마치 아둘람 동굴에 모인 사람들은 버려진 인간 쓰레기장과 같았습니다. 지도자 다윗 뿐 아니라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서는 어떠한 희망도, 미래에 대한 비전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둘람 동굴은 마치 내 인생이 목양하는 교회와도 흡사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길게 느껴지는 어둠의 터널이었지만 그곳에서 세상을 비추는 빛이, 세상을 정화시키는 거룩한 소금의 출발점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 기관으로서의 교회의 모습이라 여겨집니다. 비록 세상 적으로는 무명인일지라도, 실패하고 좌절하고, 때론 손가락질 받는 냄새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여 있어서 아무도 그곳에 빛이 들어 올 수 없다고 단정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눈은 그곳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가 내가 목양하고 있는 교회의 내면적 모습인 것입니다.
하늘기관으로서의 교회는 자전단체가 아닙니다. 세상을 향해 봉사하는 단체 또한 아닙니다. 물론 교회는 그 일을 힘써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의 본질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버림받은 사람,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 생명이 없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며, 희망의 그림을 그리게 하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았기에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 주는 곳입니다. 어찌 보면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들이 모여서, 미련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세상을 지탱할 수 있는 영적 거장으로 성장하는 곳입니다. 진실로 그러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1장21절 말씀에 이렇게 강조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교회는 이 땅에 세워진 하늘기관입니다. 비록 빛이 흐릴지라도, 냄새날지라도, 무명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삐거덕 거리며 허덕일지라도 교회는 하나님의 심장이 있는 하늘기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