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한 삶의 중요성
종종 저희 집 가든에 와서 쉬었다 가는 고양이 한마리가 있습니다. 목에 인식표가 있는 걸 보니 길 고양이는 아닌 것이지요. 하루는 저의 자동차 앞에 자릴 잡고 늘어지게 누워있었습니다. 차를 타고 움직이려니 위험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해서 고양이를 쫓아 보냈습니다. 문제는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가든으로 나가는 문 앞에 죽은 쥐 한 마리가 놓여 있었습니다. 어제 그 고양이가 자신을 위협했다고 복수한 건가 싶어 유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죽은 쥐를 정원에 묻어 줬습니다. 그리고 낮 시간에 놀러 온 고양이에게 다시는 못 오게 할 작정으로 엄하게 내쫓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같은 자리에서 죽은 쥐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이틀 연속 아침마다 죽은 쥐라니—.’저는 쥐를 묻어 주면서 이일을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이 됐습니다.
그 무렵 저희 집에 손님이 오셨습니다. 다행히 고양이 특성에 대해 잘 아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에게 제가 겪고 있는 일을 이야기를 하니 한참을 웃으셨습니다. 그리고 고양이 마음(?)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실상 그 고양이는 쥐를 죽여 제가 다니는 길에 놓는 것으로 복수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쓸모 있는 존재인지를 말하는 거라고 했습니다. 그 고양이는 지금 ‘저는 당신에게 해가 되는 쥐를 잡을 수도 있는 매우 쓸모 있는 존재입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거란 얘기였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고양이와 친해지라는 겁니다. 그리고 ‘쥐를 잡아줘서 고맙다’라고 표시하면 상황이 끝날 것이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저는 때마침 정원을 지나가던 고양이에게 고맙다고 말하면서 구운 삼겹살 한 조각을 던져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부터 죽은 쥐가 없는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고양이가 전달하려던 의도를 제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신앙하는 삶에서도 하나님의 진짜 의도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 예로 성경에서 특별히 말씀에 헌신됐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말씀을 연구하고 보존하는 일을 맡은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고 했고, 지키고 있는 자기 자신을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5:39-40 ”
예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들이 지키고 있던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진짜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는 그것을 지킬 수 있기 때문에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인생들이 노력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노력으로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의로움의 기준에 도달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철저히 인식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율법을 지켜내려고 집중하다보니 본질인 하나님을 잃어버립니다. 결과적으로 구원자가 오셨지만 그분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자신의 열심과 노력(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하려는 수고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말씀은 명확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의중을 알고 바른 신앙의 삶을 살아 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율법의 엄중함에서 자유함을 누리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답은 바로 하나님과의 친밀함입니다. 친밀함은 관계입니다. 관계를 가지려면 먼저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시간을 함께 보내고, 마음을 나누는 것 안에서라야 친밀감은 두터워집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생들이 하나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친밀함은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을까요? 등등 이런 질문에 대해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막을 통해 우리와 만나려고 하셨습니다. 성막 중에서도 특별히 속죄소(자비의 자리: the mercy seat)를 주목하고 싶습니다. 속죄소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번 어린양의 피를 들고 와서 속죄소에 뿌림으로 죄를 속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우리와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25:22
속죄소가 친밀함의 장소가 되는 이유는 그곳이 바로 인간의 죄를 사하여주는 장소이며,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속죄소는 영어로‘자비의 자리’(mercy seat-KJV, NASB)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속죄소 덮개를 열면 세 가지 물품이 나오는데 모두 인간의 불순종과 반항의 흔적이 있는 물품들입니다. 불순종의 상징인 십계명 두 돌판, 권위에 대한 반역의 표인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그리고 하나님의 공급에 대한 불신의 결정체인 만나가 그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은 자비의 덮개로 덮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비의 자리 위로 뿌려지는 어린양의 피로 용서하시겠다는 의중인 것입니다. 인생들의 모든 불순종과 반역을 보는 대신 어린양의 뿌려진 피를 보시겠다는 메시지라는 얘깁니다. 그러니 담대히 지성소로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이곳이 친밀함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는 이 공간을 은혜의 보좌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율법이 아닙니다. 관계입니다. 그래서 인간 본위의 종교적 열심은 제거 되어야 합니다. 철저히 십자가로 풀어주신 은혜를 힘입어야 합니다. 인생들의 모든 불순종과 반역을 어린양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말미암은 은혜의 보좌 앞에 서는 것이 관계의 깊이를 더하는 길입니다. 이렇게 은혜의 보좌에서 충분히 머물 때 친밀함은 풀어집니다. 우리가 이 친밀함의 은혜를 누리는 것. 이것이 우리가 이해해야할 하나님의 마음이며 그분의 중심입니다.
런던 벧엘 교회<167 A High Street. New Malden. Surrey. KT3 4BH>
이승복 목사 <07584 027756, davidlee7312@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