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는 것이란 종교적 의식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 그 말씀의 가치관으로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방식대로 살다가 일정한 시간이 되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만으로 하나님을 믿는 다고 말할 수 없어야 합니다. 이는 마치 피아노를 바이엘 기초만 배웠다고 해서 자신을 피아니스트라 소개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사람을 지으신 것은 우리를 종교적 노예로 삼으시기 위함이 아니라 당신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물려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렇게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약1:17)
교회 다니는 목적이 삶에서 발생하는 결핍을 채우기 위한 기복적인 사고를 가진 성도들이 더 많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됩니다. 복을 기치로 내세워 교세는 증가했지만 진리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지 않았기에 작은 바람에도 교회는 휘청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 하나님이 주시려는 복은 그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께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복의 통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믿음은 오늘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동일한 약속이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차원적인 복은 궁핍함을 채우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영적인 복은 세상을 책임지는 복이요, 세상을 거룩함으로 다스리는 복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신28:1)
이 복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시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하나님이 약속한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복을 받으려면 영적인 질서 안에서 훈련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영적 질서란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를 통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언제 부터 존재했는가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갈라집니다. 교회는 인류의 시작인 아담부터 존재했습니다. 물론 교회라는 단어는 그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통하여 주시려는 영적 질서는 교회라는 단어나 건물이 없을지라도 인류 탄생부터 존재해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듣는다는 것은 피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그 말씀에 동화되는 것입니다. 하나 되는 것을 뜻합니다. 내 뜻이 따로 있고, 하나님의 뜻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 하나의 뜻과 동화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영적 제도가 바로 교회의 본질입니다. 그러하기에 에덴동산에도 그 본질은 존재했으며, 노아에게도 존재했으며, 아브라함에게도, 430년간 애굽에 종살이 할 때도 존재한 것입니다. 당신의 택한 백성을 출애굽시켜 그 보이지 않았던 본질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세우신 제도가 바로 성막입니다.
성막을 통하여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종교적 계율이나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속성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주시는 직접 계시는 말씀에 의해 통제받아야 하며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영적 제도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셨고, 그 계시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 때 우리에게 주님은 반드시 물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다녔느냐가 아니라 책임진 교회가 있느냐 물으실 것입니다. 교회를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영적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마16:18)
갈수록 기독교인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교회는 텅텅 비워져갑니다. 신앙일지라도 교회를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자기 기호에 맞게 스쳐가는 정거장으로만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돌을 던지고 다른 교회로 옮기면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네가 이 땅에서 책임진 교회가 있는가? 그 교회 이름이 무엇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스쳐간 교회는 몇 개나 될까? 처음엔 은혜가 있어서 교회를 사랑했지만, 교회에 깊이 들어갈수록 약점이 보여서 돌을 던진 교회는 몇 개나 될까? 스쳐가는 교회가 있다면 결코 우리의 신앙은 신실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뜻을 교회를 통하여 전달받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과나무는 한 곳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비록 뿌리 내린 곳이 길가 밭과 같을지라도 낙망하지 않고 뿌리를 내리기 위해 인생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뿌리 내린 곳이 돌 짝 밭 같을지라도 내 뿌리에서 나오는 사랑의 진액으로 돌들을 녹여야 합니다. 비록 내가 뿌리 내린 곳이 가시밭일지라도 주님 주시는 능력은 가시덤불을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옥토에 뿌리내리길 원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교회를 찾을 수 없어서 평균적으로 몇 년에 한번 씩 교회를 옮겨 다니게 됩니다. 뿌리가 정착하기도 전에 뽑아서 다른 곳에 심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고도의 비판의식만 강화될 뿐 교회를 책임지는 순교의 믿음을 소유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자기 편리에 의해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교회를 옮겨야 할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어느 교회가 내 입맛에 맞는지 순례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릎 꿇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느 교회로 보내셔서 그 교회를 책임지게 하실 지에 대해 집중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이교회 저 교회 다니면서 목사 설교 들어보고 좋은 교회를 선택하는 교회 쇼핑을 이제는 멈춰야 합니다. 그러한 교회 쇼핑이 교회를 병들게 할 뿐 아니라 진리에서 벗어난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종교집단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 교회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 주시는 교회에서 순교할 각오가 된 자를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믿음의 사람에게 당신의 복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이 없기에 영국 땅에 5만도 안 되는 한국인들을 위해 백여 개에 가까운 교회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요, 교회를 통해서 믿음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이 식당, 저 식당을 다니듯 이교회, 저 교회를 유람하는 영적 방랑자가 배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를 통하여 표현되어야 하며,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섬기는 교회는 결핍을 해결받기 위함이거나, 종교적 유익을 얻기 위해서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순교의 정신으로 책임져야 할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교회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