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공원
현대 이스라엘은 건국(1948년 5월 14일) 이 후에 자신들의 국부인 아브라함의 이름으로 욥바에 공원을 하나 만들었다.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지난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방황하다가 이제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와 자신들의 조상들을 생각하며 자연항으로서는 유일한 항구 도시였던 욥바에 공원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아브라함 공원이라고 한 것은 여러가지 면에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이 든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 비슷한 예와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는 무너진 신앙의 핵심이며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을 다시 세우는 임무를 명확하게 부여 받고야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명령은 이사야 선지자에 의해 예언된 고레스에 의해서 명령 되었고 스룹바벨이 이 명을 이루어 스룹바벨 성전을 세웠다. 그리고 바벨론에서 에스더를 통해서 하나님의 엄청난 구원의 역사를 경험한 에스라는 2차 포로귀환 백성들을 이끌고 바벨론으로 돌아오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에스라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려고 인류 최초의 인간인 아담으로부터 자신들에 이르기 까지의 족보를 따져 본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이스라엘 사람들도 디아스포라에서 돌아와 먼저 자신들이 누구인가?를 밝혀주고 회복하게 하는 정체성 회복이 필요했을 것이며 이를 위해 공원을 만들고 이스라엘 민족의 국부인 아브라함 공원이라고 불렀을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복해야 할 정체성
공원은 자신의 자식들에게 이스라엘 신앙의 정체성을 이어가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신들이 누구인가를 알리고 싶어하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만든 공원이였을 것이다. 조그만 언덕에 꾸며진 아브라함 공원은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규모의 공원이다. 공원의 내부를 살펴보면 중앙에 조그만 아치형의 조형물이 하나 서 있다.
동양에서는 아마 이런 공원을 세운다면 비석에 글로 그 뜻을 나타내려 했을 것이지만 하늘로부터 계시와 비젼을 받은 민족답게 아브라함 공원은 간단한 부조물로 모든 것들을 표현하는 작품을 세워 놓은 것이었다.
무엇이 이들로 이스라엘이 되게 했는지를 이해하게 해 주는 형상 언어의 부조형태를 담은 작품이라는 것이 깊은 감동을 준다. 그것은 돌로 조각을 한 작품으로 맨 꼭대기 상판에는 여덟명의 나팔수가 나팔을 부는 모습이 조각이 되어있고 양 옆에도 조각을 한 기둥들이 바치고 있다.
그럼 무엇이 이들로 이스라엘이 되게 했다고 이들 스스로가 생각하는가? 또한 우리가 이해하는 이스라엘과 이들이 말하고 싶어하는 이스라엘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얻는 비결
제일 위의 상판에 조각되어있는 모습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를 정복할 때 제사장들이 법궤 앞에서 나팔을 불며 언약궤를 중심으로 여리고를 돌았던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아마 이 상판이 이 부조물 중에도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정신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나안 땅이란 애굽에서 출발하여 도착해야 할 여행의 목적지였으므로 당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이들의 삶의 목표였을 것이다. 사람이 삶의 분명한 목표와 비젼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삶의 목표가 분명하지 않았던 광야 1세대는 가나안 땅을 밟아 보지도 못했다.
또한 출발지 애굽에서 이들은 애굽의 주인 바로에게 “우리가 광야로 나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을 예배하러 가겠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들이 도착한 가나안 땅은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땅이어야 하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회복하는 땅이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가나안 땅의 정복은 힘이나 능력이나 칼과 창으로 정복하는 땅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 가나안을 점령하는 비결을 성경은 이렇게 적고 있다. “너희는 들네지 말며 나팔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법궤만 바라보고 따라 성을 돌아라!”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힘이 아니었다.
강력한 무기도 아니요 다만 온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께 전심으로 집중하기만 하면 되었다. 가나안 땅의 첫 관문인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방법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제사장들의 나팔 소리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겸손히 따라 가기만 하면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간단 한 것 같으나 세상의 많은 소리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며 세상엔 바라보고 기대할 것이 많이 있으나 하나님의 임재만을 기대하며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는 교훈이 들어있는 것이다. 이렇게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힘의 원천이요 비밀이었을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와 같은 방법과 마음으로만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정복할 수 있고 그 땅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화해의 제사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런던 영광교회 안병기 목사)
아브라함 공원 2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전쟁으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전쟁의 모습을 담은 상판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 두개가 있었는데 한 기둥에는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독자 이삭을 드리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고 또 한 기둥은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가다가 루스에서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하늘이 열리고 사닥다리가 내려와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꿈을 꾼 것을 조각한 것이었다. 그럼 왜 이 두 기둥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내용을 바치게 했을까? 우선 한 기둥에 조각되어 있는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드리는 장면은 이스라엘 신앙을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배를 통해서 이 땅에 썩어질 것을 심고 신령한 것으로 거두는 신앙.
아브라함은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갔다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아들을 주시기로 약속하시면서 맺은 언약이 횃불 언약인 것이다. 횃불 언약이란 당시의 주종관계를 맺는 언약이었던 것이었다. 서로 언약을 어겼을 때는 제물로 드리는 희생처럼 벌을 받을 것을 맹세하는 언약이었는데…….이 때 횃불을 들고 희생제물 사이로 지나는 것으로 맹세의 의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송하게도 아브라함을 지나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횃불을 제물 사이로 지나신 것이다. 이 의미는 바로 이 언약이 어겨졌을 경우에 하나님이 그 책임을 지시겠다는 하나의 불평등조약이다.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
그 후에 하나님은 약속대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셨다. 100세에 얻은 아들이라 얼마나 좋았을까? 자식이 주는 즐거움은 하늘이 주는 복이라는 말도 있듯이 아마 그 후의 삶은 아브라함에게도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였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으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맛보게 하신 것이다. 얼마 동안 정말 이 행복을 만끽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어쩌면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느껴졌고 바꿀 수 있다면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내 놓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아들을 살리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생각은 달랐다. 주신 분이 거둘 수도 있고 주신 분은 다시 주실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한 것이다.
이 때는 이미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였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제물로 드린다 하여도 다시 하나님께서 아들을 살려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 기꺼운 마음으로 드리기로 작정하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 모리아 산까지 사흘을 걸어 가서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기꺼운 마음으로 드리자 하나님은 이삭을 대신하여 큰 선물을 준비하셨다. 네가 너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아끼지 않고 나에게 바쳤으니 나도 나의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주시기로 작정을 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신적교환이라고 부른다.
이 땅의 없어질 것으로 드리고 하늘의 영원한 것으로 되돌려 받는 축복이 인류에게 임한 것이다. 이것을 예배라고 하는 것이다. 예배는 우리가 이 땅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늘의 영원한 것으로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이 처럼 수지가 맞는 장사가 어디 있을까!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축복이 예배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삭을 대신하여 드릴 수 있는 숫 양도 준비해 주셨기에 이삭은 번제로 드리지 않아도 되었다. 다만 모든 것들을 돌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했던 아브라함의 마음만 받으신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은 아무 것도 드린 것이 없지만 하나님이 준비하신 선물들은 고스란히 아브라함의 것이 되었다. 이런 약속을 따라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악을 대신 담당하시려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고 죽음을 의미하는 해골이라는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를 지시고 오르신 것이다. 하나님의 맹약으로 이루어진 예배 속에 드림의 메커니즘은 오늘 날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신앙의 진수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의 진수를 아브라함의 예배 속에서 찾은 것이다.
(런던 영광교회 안병기 목사)
아브라함 공원 3
하나님께 이르는 길
아브라함 공원에 있는 부조물의 다른 한 쪽 기둥은 계시의 하나님을 보여주는 사건을 조각해 놓았다. 야곱이 이삭으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얻어내고 에서의 낯을 피해 밧단 아람으로 가는 도중에 난생처음 노숙을 하게 되었다. 그는 지금의 예루살렘을 조금 더 올라간 베냐민 고원에 있는 루스라는 곳에 이르자 날이 저물어 노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잠을 자는데 꿈에 하늘 문이 열리고 천사가 사닥다리를 타고 오르락 내리락 하는 모습을 보여 주시고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에게 내가 너를 통해 이룰 일을 이룰 때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지키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자신이 베고 자던 돌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 앞에서 서원하며 기도하기를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내가 무사히 이곳으로 다시 오게 되면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내가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겠으며 이곳에 하나님의 전을 세우겠습니다” 한 사건을 조각해 놓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야곱은 꿈 속에 신비한 문을 열어 하늘에 이르는 길을 보여 주셨으나 불행히도 밧단아람에서 돌아와 바로 벧엘을 찾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면서 환도뼈가 부러질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축복을 받아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신앙은 기도와 예배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또 하나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늘의 하나님을 이 땅에서 섬길 집을 만들겠다는 야곱의 서원이 바로 성전으로 이어지고 그에게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 서원은 야곱 가에서 대대로 신앙의 맥으로 이어져 내려 오다가 다윗 대에 이르러 진정으로 하나님의 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정말 간절한 소원으로 하나님께 아뢰었으나 다윗에게 허락지 않으시고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그 일을 맡기신 것이다. 이러한 상징들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확실하게 이루신 것이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하나님께 세상의 가장 좋은 것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고 영생의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야곱의 심령 속에 계시의 영을 부어 주셔서 하나님의 전을 허락하시고 그 이름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이끄시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시는 나라가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이런 세가지의 사건들을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적 이념과 상징으로 삼는 조각으로 아치형의 축조물을 세워놓은 것은 아브라함 공원의 진수라고 할만하다.
이스라엘 민족의 특별성
이러한 사건들을 디아스포라에서 돌아온 현대의 유대인들도 이 이스라엘의 신앙을 민족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고 그 신앙의 핵심으로 구축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대 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이르려고 스스로 자신들의 힘으로 하늘에 이르는 탑을 쌓아 왔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하늘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의 책망과 징벌로 언어는 혼잡해져 온 세계에 흩어져 살아야 하는 징계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길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에게 직접 하늘의 문을 열어 당신을 계시해 주심으로 인간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려 주시는 사건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더욱 분명해 진 것이 있다면 사람이 아무리 스스로 하나님을 찾으려 해도 만날 수 없고 알 수도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그의 백성들에게 스스로 하늘을 여시고 당신을 계시하신 계시의 민족임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제 돌아와 시작하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세가지 사건으로 요약하여 계시를 받은 민족답게 이 사건들을 그림의 언어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이 다른 민족과 구별되어진 신앙을 소유한 민족으로서의 정체성과 인간이 하나님께 이르는 두가지 길 중에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하나님께 이르는 민족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런던 영광교회 안병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