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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새롭게 시작하는 2016년 -변영기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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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시작하는 2016

 

이제 새해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새로운 시작의 시점에 서게 되면 항상 그래왔듯이 은빛 희망을 품곤, 그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삶의 그림을 그리며 힘찬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이런 설렘과 희망에 가슴 부푼 우리들을 한번쯤은 곰곰이 생각해 보게 하는 한 사람의 고백이 여기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꿈꾸는 성공이라는 이름의 부, 명예, 행복, 쾌락의 최고 정점을 경험했던 솔로몬 왕, 그는 그의 말년에 성공의 어떤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입을 열자 말자내가 경험한, 그리고 지금 여러분들이 그렇게 갈망해 하는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된 것 중에 가장 헛된 것입니다(전도서1)” 라고 여러 번 반복해가며 애절하게 외쳐 댑니다.

 

솔로몬의 이 고백에 대한 이해를 돕는 예수님의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그렇게 갈망하는 것을 다 얻고도 네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니? 생명의 가치를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니? (마태복음16:26)” 여기 생명이라는 의미는 시공간 속에 극히 제한된 눈에 보이는 단순한 육체적인 호흡이 아닌, 하나님 속성의 한 부분으로 온 인류가 끊임없이 노력하고 추구해 오면서도 눈에 볼 수 없어 쉽게 포기하는 ,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가치입니다. 그렇다면 상반된 세상과 생명, 두 가치를 함께 얻을 수는 없을까 하는 매우 매력적인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하나를 사랑하면 다른 것은 미워할 수밖에 없듯이 결코 두 가치를 함께 소유할 수 없다.(16:13)”라는 아주 단호하고 분명한 답을 주시고 있습니다.”

 

세상은 온통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명예와 성공이라는 세상의 가치를 거머쥐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에는 반대로 세상 사람들이 성취한 이런 것 들을 마치 악취 나는 쓰레기나 벌레처럼 떼어 버리려고 안달이 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자가 낳은 중에 제일 큰 자라고 예수님께서 칭찬하셨던 세례 요한은 그분은 점점 번영해야 하고 나는 점점 망해야 한다.” 라며 고백했고, 그리고 그는 그가 고백했던 대로 30대에 목이 잘려서 죽으며 망했습니다. 당시 그 사회에서 최고의 학벌과 실력으로 최고의 명예와 부를 얻었고, 사람들로부터 성공의 아이콘으로 그렇게 부러움을 받았던 사도바울은 그가 노력해 얻은 모든 업적을 미련 없이, 악취 나는 배설물처럼 버린 후, 그렇게 그를 존경하고 영웅대접을 했던 사회로부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치, 고통, 많은 죽음의 위협 속에 살다가 결국 죽음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매혹적인 여인, 자신의 충실하고 훌륭한 부하 우리야 장군의 아내, 밧세바의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끓어오르는 욕정을 참치 못해 그 여인을 임신을 시키곤 그것을 은폐하려고 그렇게 소중한 부하를 끔찍하게 계획 살인했던 악한 왕, 자신의 죄를 깨달은 후, 그 죄로 인하여 편안히 휴식해야 할 그의 침대의 베개, 이불을 온통 눈물로 적셔가며, 주체할 수 없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용서를 구하던 다윗 왕, 그는 그 후 시편에서 주님께서 생명의 길을 보여주시니 바로 거기에 진정한 기쁨이 충만하고,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시편16:11) 라고 고백하며, 세상의 가치가 아닌 생명의 가치를 선택하라며 아주 강한 어조로 우리를 설득하고 있습니다.

 

이 가치의 충돌은 그 시대 뿐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속에서도 여전히 상상할 수 없는 극단적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몇 일전 저는 인도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10, 20대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 인도에서 군중들로부터 매를 맞으며 저항하지 않고 서서히 피를 바닥에 뿌려가며 죽어가는 장면들, 그리고 이라크에서는 같은 이유로 IS에게 손과 발, 목이 잘리며, 여자들은 집단 강간을 당하기 위해 끌려가는 모습, 방금 태어난 유아가 그리스도인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많은 관중들 앞에서 한 IS 성직자의 발에 잔인하게 밟혀 죽는, 상상할 수 없는 장면들을 나의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연속적인 비명과 솟구치는 눈물로 지켜봐야 했습니다.

 

그들이 붙잡고 있는 이 생명의 가치를 부인하면 목숨을 건질 수도 있었는데……. 그런 참혹한 현장에서 무력해 보이는 그 생명의 가치가 그렇게도 소중하다는 말인가? “자신의 목숨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마태16:25)”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면 우리들이 볼 수 없어서 그렇지 그들은 결코 죽은 것이 아니라 실상은 가장 확실하게 살아있는 자들입니다. 실제로 세상의 가치를 철저히 포기한 사도바울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세상의 가치(보이는 것)를 바라보지 않고 생명의 가치(보이지 않는 것)를 바라봅니다. 왜냐면 세상의 가치(보이는 것)는 잠깐이지만 생명의 가치(보이지 않는 것)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4:18) 예수님께서는 없어질 세상의 가치 위에 세워진 삶,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가치 위에 세워진 삶을, 잠시 후 밀물이 들어 닥치면 곧 무너질 모래 위에 세운 집과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바위 위에 세워진 집의 비유(요한15:26,27)를 들어 설명하고 계십니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면 세상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15:13)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줄 만큼 그렇게 사랑하는 자녀와 배우자와 함께 사는 삶은 세상이 부러워할 만큼 정말 행복한 삶인 것 같이, 우리의 생명을 바쳐서 지키고 싶은 그런 소중한 가치를 갖고 사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세상에서 가장 성공하고 행복한 사람임에 다름이 없을 것 입니다.

 

새해가 시작 되는 이 계절에 어떤 가치 위에 여러분들 삶의 집을 지어 보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316)

 

<변영기 선교사 / 재영한인선교사협회 회장 byunyoungkee@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