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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불같은 시험을 이기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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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역사에서 불같은 시험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교회역사는 고난과 고통, 시련의 땀과 눈물, 순교의 피로써 기록된 역사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교회 역사를 이해하려면 그만큼 눈물과 땀과 피의 시각으로 보지 않으면 역사를 오히려 왜곡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한 안정된 역사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불같이 다가오는 시험을 참고 인내하라고 성령의 감동으로 편지를 써서 성도들에게 보냈습니다.

오늘날에의 환경에서는 불같은 시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불같은 시험이란 어떤 의미적인 아니라 실제사건 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당시에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일원이 되면 시기가 달랐을 뿐이지 사형언도를 받아 놓은 사형수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과 정 반대의 개념입니다. 예수를 믿는 이유, 교회를 다니는 이유가 구원과 영생을 얻기 위함이 목적이기도 하지만 이생의 풍성함을 얻기 위한 기복적인 목적이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이생의 잘됨을 위해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죽기 위해 교회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마16:25-26)  

그래서 성도들이 받는 처형을 변병하지 않고 구차히 받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히11:34-38)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방법에 대해서는 다양 했습니다. 불로 태워 죽였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였으며, 톱으로 켜서 죽였으며 목을 자르는 참수형으로 죽였으며, 원형경기장에서 굶주린 사자들의 밥이 되게 했으며, 돌로 쳐서 죽였으며, 몽둥이로 떼려 죽였으며, 끓는 기름 가마솥에 튀겨서 죽였습니다. 이러한 죽임의 집행은 국가가 허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고난이 있을 때 절대 감소하였거나 존재 자체가 흔들린 것이 아닙니다.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은 살기위해 구차히 변명하지 않았으며 담대히 죽임을 택했습니다,

죽음 앞에는 어떠한 권력이나 핍박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어떠한 정치적 권력에도 죽음으로 받아들이면 그 정치 세력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한국의 군사정권이 힘없는 민초들 앞에 무너진 것은 많은 사람들 무자비한 군화 발과 탱크 초 앞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유혈사태가 발생하면 승리하는 것은 세력을 가진 집단이 아니라 그 앞에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민초들이 승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강력하게 핍박한 집단은 로마입니다. 로마의 11대 황제인 네로라 불리는 도미티아누스는 그리스도인들을 처형하기 위해 황제가 된 듯 했습니다. 더 잔인하게, 그리스도인들이 치를 떨도록 고통스럽게 죽이도록 명령했습니다. 자신의 정치적인 약점을 그리스도인들을 처형하는 것으로 백성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함으로 이목을 분산시켰습니다. 죽여도, 죽여도 교회는 폐쇄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네로 스스로 지치기 시작 했습니다. 당시 네로는 신도시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초라한 건물들을 철거해야 합니다. 이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한국에서도 많은 지역에서 정부의 신도시 계획에 맞서는 서민들이 있습니다. 로마 정부도 그러했습니다. 그러한 고민은 한 방에 해결한 아이디어를 한 신하가 제공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지역을 불을 태워 모두 진멸하고 방화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 계획은 획기적인 계획이었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AD 64년 드디어 로마의 한 지역이 화염에 불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모든 도로는 패쇄 되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화제의 주범을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하였습니다. 백성들의 분노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집중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네로 황제와 그 권력은 기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세상에 공포한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같은 시험이 성도들을 위협하였던 초대교회는 실제적 사건입니다. 오늘날 자유주의 나라에게는 교회를 구체적으로 핍박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과거의 핍박 시대보다 영적인 순결성과 세상을 향한 거룩한 힘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더 이상 교회를 윤리와 도덕성 위에 있는 하늘 기관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날 불같은 시험인 자유주의와 인권, 윤리와 도덕적인 철학에 짓눌려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믿는 사람 보다 더 잘 있다는 도덕적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위에 있는 세상입니다. 현대의 불같은 시험은 내 안에서 어떠한 이유로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마음이 내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