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jvcc.org바닥의 힘
우리 속담에 '눈물의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과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빵을 먹지 않는 나라에서 눈물의 빵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한국 정서에 빵을 먹는 것은 가난의 극치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하여 서러움의 빵을 먹을 수밖에 없는데 그 빵도 기쁨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눈물로 먹어야 한다면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내려온 삶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인생은 바닥에서 하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에서는 결코 하늘을 볼 수 없습니다. 정상에서는 정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래로 내려와야 정상이 보이는 것입니다. 아래를 경험하지 못한 정상이라면 그 자리 자체가 욕망의 자리가 될 뿐입니다. 시대에 획을 그었던 위대한 인물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닥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닥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면 백성들의 피를 말릴 것이 분명합니다.
오래 전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웃지 못 할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국가의 경제는 국내의 경제의 활성화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외국과의 무역이 경제적 좌표가 됩니다. 그것을 깨달아 국가 차원에서 무역을 장려하기 위해 국제적 마인드를 가진 공무원들은 불철주야 뛰어 다녀야 했습니다. 우리 물건을 외국에 팔기위해서는 외국의 물건을 수입해 와야 합니다. 국내의 장관들은 무엇을 수입해야 할지 논의했습니다. 처음으로 수입이 활성화 된 것은 외국 기업의 과자와 장난감인 서민들의 생활필수품이 아니라 부잣집 아이들의 기호품이었습니다. 조국의 경제가 어려웠기에 이는 사치품이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바닥 경제를 몰랐던 고위급 공무원들은 자신들의 손자나 손녀들에게 기호품에 대한 부재가 그러한 것임을 직감하고 그것을 수입함으로 국가 발전에 일임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서민들은 먹을 양식이 없어서 궁핍하였는데 기득권층의 자녀들은 국내에서 생산하는 것에 불만족하여 수입하여 먹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시대였습니다.
인생의 성공 여부는 정상 지체로 볼 수 없습니다. 정상이라는 고지를 점령한 것은 자신의 영특함이 아니라 하늘의 선물입니다. 그렇게 정상을 선물 받은 이유는 아래로 내려가서 그곳을 주 무대로 살고 있는 백성들을 섬기라고 주어진 하늘의 사명입니다. KBS특별기획 역사 드라마 "명가"에 300년간을 부자로 살아온 최부자의 일대기가 영상화되었습니다. 드라마의 시작 멘트가 내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여기 낙타를 타고 바늘구멍을 통과한 한 가문이 있다. 경주 최부자, 13대 300여 년간 만석꾼 부를 유지해 온 가문, 이는 세계사적으로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300년간 부자의 비밀에는 이 가문만의 독특한 가르침이 있었다. 사방 100리 안에 굶주린 이웃이 없도록 하라. 흉년에 땅을 사지 말 것이며,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지나는 과객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진사이상 벼슬을 하지 말며 만석이상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이 드라마는 300년간 만석꾼 재산을 지키며 그 재산을 가장 아름답게 완성했던 한 명문가에 대한 이야기 이다. "
재물의 넉넉함은 하늘이 주신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자신의 배만을 위한 정욕적인 수단이 아니라 백성들을 섬기기위해 주어진 복입니다. 성경에는 부자에 대한 이야기가 몇 차례 등장합니다. 아브라함도 당대의 부자였으며 욥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의 부는 백성들을 섬기는 거룩한 재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두 명의 부자가 나옵니다. 한 부자는 정치적 야망이 있었던 사람으로서 날마다 호화로운 연회를 열었던 사람이요, 또 한 사람은 율법을 준수했던 청년이었습니다. 이들의 부는 자기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부는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뽑아 자신들의 부를 이룬 사람입니다. 수많은 양을 소유했으면서 잔칫날 한 마리의 양이 전 재산이 가난한 백성의 양을 잡아 자신의 배를 불린 자입니다. 그렇다고 가난이 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부의 출처입니다. 하늘로부터 온 부라 여긴다면 그 부를 통하여 백성들을 섬기는 거룩한 재료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가 자신의 명석함으로 온 것이라 여긴다면 자신을 가두는 욕망의 틀이요, 민초들의 지탄이 되는 졸부가 될 것입니다.
인생은 정상부터 시작할 수 없습니다. 간혹 정상에서 태어난 사람들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상을 지킬 수 없습니다. 정상의 삶은 인간을 파멸시키는 욕망의 전차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던 연예인들의 자살을 접하게 됩니다. 아쉬움이 없는 삶이었는데 왜 죽어야만 할까?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눈부시도록 빼어난 외모, 인기, 주체할 수 없는 재물, 평민으로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화려한 삶을 그들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사회적 책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정상만을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되었습니다. 조금이라 정상에서 벗어나는 조짐이 보인다면 그것을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닥의 삶을 경험하고 그 삶을 위해 헌신하지 않는다면 결코 주어진 정상의 삶은 자신을 찌르는 비수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정상의 삶을 원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러합니다. 그러나 고지론 주의자의 삶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고지를 점령하되 그곳에서 살기 위함이 아니라 더 낮은 곳으로 내려와 그곳에서 더불어 살기 위함인 것입니다. 시대의 획을 그었던 위대한 사람들은 그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정상의 힘을 믿은 것이 아니라 바닥의 힘을 믿었습니다. 권력은 정상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닥으로부터 그 힘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기초가 됩니다. 선거 때가 되면 바닥으로 스스로 내려옵니다. 바닥의 사람을 끌어 않습니다. 그러곤 돌아서서 더러운 때를 닦아내는 정치인들은 정상을 유지할 수 없으면 혹이 정상에 있는 만큼 고통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눈물의 빵은 바닥에서만 먹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목적을 망각할 때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의 고통의 빵을 꺼내야 합니다. 그 바닥의 힘이 자신의 명예가 됩니다. 주어진 정상을 유지할 수 있으며 고지에 오른 만큼 세상에 빛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닥의 경제, 바닥의 삶을 무시하는 국가나 기업들은 쇠퇴할 것입니다. 종교 역시 그러합니다. 세상은 정상들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바닥의 힘에 의해 유지되고 하늘의 뜻은 정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닥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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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국 박심원 목사 http://jvcc.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