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표(?)에서 느낌표(!)로
구세군런던한인교회 김병윤 사관
인류의 문명과 과학과 지식은 어떤 문제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발전해 왔다. 바른 질문은 올바른 해답을 가져온다. 공허하고 잘못된 질문은 더 큰 공허감만 주게 된다. 그래서 옳은 질문이 필요하다. 인류의 행복과 발전을 위한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질문을 나는 환영한다. 이런 건전하고 올바른 질문들이 우리 사회를 더 건강하게 바르게 만들어 간다고 믿는다. 우리의 삶 속에는 아무리 바른 질문을 던져도 해답을 얻지 못하는 것들도 많다. 과학 기술이 엄청나게 발달한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시원한 해답을 주지 못하는 많은 문제들을 우리는 안고 살아가고 있다.
성경에 보면 어느 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신에게 찾아 든 불행의 엄청난 무게를 온 몸으로 버티면서 욥이라는 사람은 하나님께 이런 질문들을 쏟아냈다. “제가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제가 어떤 범죄에 연루되어 있습니까? 어찌하여 주님께서 나를 피하십니까? 어찌하여 주님께서 나를 원수로 여기십니까? 주님께서는 줄곧 나를 위협하십니까?”(욥기13:23-25)
욥은 이런 자신의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고민해 보았지만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해답을 주셨을 때 비로소 자신의 삶을 옥죄고 있던 모든 의문과 질문들에 대한 명쾌한 답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물음표와 의문부호로 가득했던 그의 삶이 느낌표로 바뀌어지는 것을 경험하며 이렇게 고백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욥42:2,5) 물음표로 가득했던 인생이 느낌표로 바뀐 것이었다.
얼마 전 이런 시를 지어 페이스 북에 올렸다.
일상은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의 팽팽한 긴장
그 어디엔가 내가 서성대고 있다
오늘도 물음표 빼곡한
삶의 문제지 받아 들고
내가 서 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어찌하여?
아니 왜?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왜 나를 이렇게?
이 일을 어떻게?
주님,
이제는
믿음의 지우개로 물음표를 지워내고
은혜의 느낌표로 채우게 하소서
아!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주님!
그래서 그랬군요!
이제야 알겠습니다!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지치고 힘들 때
쉼표도 찍을 줄 아는 여유를 가지게 하소서
삶의 마침표를 찍는 그날까지
은혜의 느낌표로 가득하게 하소서
글을 올리고 난 후 잘 아는 자매님이 이 시보다도 더 훌륭하고 심오한 답글을 올렸다:
“굽어있는 물음표의 등이 곧게 펴져서 느낌표가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고 그 시간은 참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때로는 우리가 느끼는 슬픔과 절망이 물음표가 고개도 들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붙잡아 놓지만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은 그 물음표를 펴서 느낌표가 되게 하시기에 충분하다는 것 하나로 그 시간을 견디는 것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소망이 되는 것 같아요.”
이 답글을 보면서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더 깊은 곳까지 보고 생각해 냈던 자매님의 영성과 사고의 깊이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가만히 보면 물음표와 느낌표는 굽어 있느냐 펴져 있느냐의 차이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분명 물음표로 표현하기에 더 적합한 삶의 정황도 느낌표로 표현해 낸다. 또 어떤 사람은 느낌표를 사용하기에 충분한 일들도 굳이 굽은 시각으로 올곧은 느낌표를 힘겹게 구부려서 물음표로 만들어 버린다. 자매님의 표현대로 ‘때로는 우리가 느끼는 슬픔과 절망이 물음표가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붙잡아 놓지만 그 물음표를 펴서 느낌표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임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해 준 자매님에게 감사한다.
매일 눈을 뜨면 의문과 질문으로 가득 찬 일상이 하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더 풍성한 모든 것들을 누리면서 느낌과 감동과 감사로 채워지기를 겸허히 소망해 본다. 물음표를 펴서 느낌표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참된 희망이며 해답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요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