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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낯설음과 익숙함 – 김병윤 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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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낯설음과 익숙함 사이를 오가는 시간 여행과도 같다. 사람은 낯선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려워한다. 아기는 낯선 사람을 보면 울음을 터뜨린다. 이는 낯설음을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인간의 순수한 본성을 잘 보여준다. 아기는 낯이 익고 친숙한 사람을 보면 웃는다. 안심한다. 사람들은 낯선 사람은 경계한다. 그 낯선 사람이 익숙하고 친숙한 사람이 될 때 까지는 마음을 쉽게 열지도 않는다. 우리는 모두 낯설음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낯설음은 곧 불편함이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서는 편안하지 않다. 낯선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도 편치 않다. 익숙하고 친숙한 것이 우리에게 안정감을 주기 때문에 낯설음과 빨리 결별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익숙함은 우리를 안이함과 게으름으로 이끄는 함정이 되기도 한다. 익숙함에 깊이 젖어 있으면 더 이상의 발전과 자기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익숙함과 결별하지 않고는 자기 혁신과 변화를 꾀할 수 없다. 새로운 자기 발전과 향상을 위해서는 우리 앞에 찾아오는 낯설음에 용기 있게 다가서야 한다. 낯설음을 맞이해야 한다. 사람들이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도 낯선 환경만이 줄 수 있는 주는 매력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관계도 두 사람 사이의 낯선 것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고 줄어져가면서 찾아오는 친밀감이다. 익숙함은 반복성을 전제로 하여 일상을 만든다. 그러므로 익숙해지는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서로 낯선 것들이 익숙해질 때 까지 기다려주는 배려가 필요하다. 아무리 낯선 것도 자주 접하면 쉽게 익숙해지고 친숙해진다. 낯선 사람도 자주 만나고 부딪히면서 익숙해지고 친숙해진다. 낯선 곳도 자주 찾아가면 익숙하고 친해진다. 서로에 대해 익숙해 지는 것은 서로를 용납하고 참으면서 함께 만들어가는 노력의 결과물이다. 기다림과 배려가 없이는 서로에게 친숙할 수 없다. 낯선 관계가 익숙하고 친숙한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용납함과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내어주고 마음을 여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가족은 지난 2003년 여름에 영국에 왔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사람들도 낯설었다. 도로도 낯설었다. 운전하는 것도 낯설었다. 여름에도 서늘한 기후가 낯설었다. 한국의 겨울과는 사뭇 다른 추위도 낯설었다. 뼛속을 시리게 하는 음산한 겨울이 낯설었다. 음식도 낯설었다. 그러나 그런 낯설음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익숙해지고 친숙해 졌다. 낯설기만 했던 사람들도 친숙해 졌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마음을 다 내어줄 정도로 친숙해졌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모든 것에 익숙해졌다. 영국의 생활 환경과 문화에 익숙해 졌다. 이제 낯설음을 대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그러나 이제 익숙하던 모든 것들과 또 다시 결별하려고 한다. 결별해야 할 때가 되었다. 또 다른 낯설음과 마주하기 위해 떠나려 한다. 낯선 환경, 낯선 사람들, 낯선 일들…… 그 낯선 것들이 또 다시 익숙해질 무렵이면 하나님은 또 다른 낯설음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이다. 지금까지의 익숙함에서 벗어나 기꺼운 마음으로 낯설음과 대면하려 한다. 한국은 우리가 살던 고국이기 때문에 처음 영국에 왔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낯설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요즘은 변화의 속도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변화된 고국의 삶에 재적응하는데도 적잖은 낯설음이 예상된다. 하지만 낯설음과의 대면은 늘 새로운 도전과 변화와 창조적인 긴장을 주기에 기쁨과 설레임으로 낯설음을 맞이하려 한다.

10년 전 낯선 우리 가족을 익숙함의 자리로, 친숙함의 공간으로, 여러분의 삶의 자리로, 낯설음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초대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이 지면을 빌어 마음 깊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같은 하늘아래 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지금까지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저희 가족이 머물다 간 자리가 아름다움으로 기억되기를 염치없이 소망합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들과 사업장에 하나님의 복이 언제나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