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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교회를 향한 보편적인 생각 – 박심원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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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바라보는 시각들이 각각 다릅니다. 보통은 세 가지 견해로 압축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 견해는 지극히 개인적인 해석일 뿐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시각이요, 둘째는 교회일원의 시각과 교회 밖인 그리스도인의 후보군들의 시각입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첫 번째 시각인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져야 합니다. 둘째와 셋째의 집단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다소 있더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춘 교회라면 교회의 본질과 순수성을 잃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운영되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한다고 고백하는 것에 있습니다.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심심찮게 사회 뉴스거리로 등장 합니다. 좋은 일에 주인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비윤리적인 부분으로 화젯거리가 되기에 그 소식을 듣는 이로 하여금 혀를 차게 합니다. 그중 한 획을 긋는 문제는 대형교회의 세습일 것입니다.

교회 세습은 과거에도 존재해 왔습니다. 낙도의 작은 교회를 아버지에 이어서 아들이 목회하는 현장을 목도했습니다. 오래 전 이야기지만 신문에 좋은 의미에서 화제 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한센 병 성도들을 위한 작은 교회에 목회하는 아버지를 위해서 독일에서 수학을 한 유망주 목사님이 대를 이어서 목회하는 모습은 세상에 비춰진 아름다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대형교회 세습을 바라보는 시각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작은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로서 감히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대형 목회의 세계에 대해 언급할 자격은 없지만, 조심스레 던지고 싶은 말은 세습을 위해서 비윤리적인 문제를 자행하면서 하나님이 뜻에는 위배되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어집니다. 대형교회를 아들에게 물려주면서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있었고, 성도들 대다수가 찬성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누구도 그 뜻에 딴죽을 걸지 말아야 합니다. 딴죽을 건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행위일 것이며, 그 교회의 수십만이나 되는 성도들을 무시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습을 하는 집단은 그것이 하나님이 뜻이라 하고, 외부에서는 돌을 던지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어떤 특정 교회를 비판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제가 목회하는 지극히 작은 교회일지라도 사회적 이슈가 되지 않을 뿐이지 가끔은 목사의 개인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혼동하는 경우가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큰 교회는 당연 사회적 이슈거리를 태풍처럼 몰고 다니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문제는 큰 교회, 작은 교회가 아니라 크고 작든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분별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계획에 대해선 인간은 거역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택함 받기 위해서 시험을 치른 적이 없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75세에 나타나셔서 고향을 떠나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그 많은 사람 중에서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셨는가? 이렇게 묻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 고유의 선택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배재하고 이해한다면 비윤리적이며 반사회적인 내용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즉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주시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시대에 가나안에는 이미 열두 개의 나라가 존재했습니다. (창15:18-21) 그들에게는 전통적인 문화가 있었으며, 사회, 정치, 경제, 모든 분야에서 안정된 나라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중 여리고는 무역도시로서 국제적 규모를 갖춘 도시였습니다. 이미 땅주인이 버젓이 있는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만약 이 사실을 가나안 거민이 알았다면 현대식으로 이해한다면 국제 법정에 서야할 사건일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하여금 가나안에 정착하게 하셨습니다. 그 정착하는 과정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역사였습니다. 인본주의적인 생각으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은 잔인한 분이 아니신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전쟁을 하되 여성뿐 아니라 어린아이와 짐승까지 죽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고로 하나님을 향해 항의 할 수 있지만 이는 창조주 하나님을 침범할 수 없는 고유한 계획이기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한 사실이 현대에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다른 민족을 멸하라 명령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일부 원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전을 명령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을 때 비도덕적인 면을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뜻이 전달되어질 때 그 뜻이 반사회적인 것으로 지탄 받을 내용이라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이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구속사적인 역사를 완성하기 위해서 때론 잔인한 역사가 주어졌지만 구속사가 완성된 후에는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도덕적이며 윤리적이고,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이라 주장하면서 반인류적이며 비도덕적이라면 그것은 자기 욕심을 하나님으로 뜻으로 정당화 한 것입니다. 교회를 향한 보편적인 생각은 상식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존경받을 수 없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할지라도 개인의 욕망을 완성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는 것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