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적 예수와 실존적 예수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바로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고 현상이 생기는 것인가? 특히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이 든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어제 일어난 놀라운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엠마오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에 끼어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이 주님인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들의 화제 역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들이 믿고 따르던 주님이 실망스럽게도 큰 죄인이 져야할 저주의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안타깝고 원통한 마음으로 이 사건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심정을 같이 어울려 이야기 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보인다. 그럼에도 이들은 여전히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자 주님은 모세의 글에서 시작하여 모든 선지자의 글에 주님에 관한 모든 예언들을 풀어서 설명을 하신다.
첫 번째의 원인은 이들이 자신들이 기대한 예수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들이 주님을 옆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자신들이 기대한 예수에 사로잡혀 실제적으로 존재하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가 기대하는 예수라는 것은 우리의 이성과 내가 설정한 예수의 모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나의 이성이 생각하는 테두리가 정해지기 때문에 울타리처럼 울타리 밖의 세계나 다른 모습에 대해서는 눈뜬 소경과 같은 상태가 된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의 사역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들이 기대하는 메시야와 다르다는 것이 이들의 기본자세였다. 메시야는 반드시 이스라엘을 구원할 정치적인 구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 있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이 죗값을 자신들이 받겠다고 선언을 했던 것이다.
만일 이들이 정말 예수님의 사역이 메시아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어렵 풋이라도 생각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도 당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떤 생각의 한계가 주어지면 그 밖의 것은 볼 수 없으며 이러한 우리의 생각 밖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거나 바라볼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의 문화와 예술의 세계를 소개하는 "내가 본 문화유적 답사기"(유홍준 선생의 글)를 읽으면서 정말 감명 깊게 읽었지만 우리가 가지는 이성적인 모순은 '내가 아는 것만큼 밖에는 보지 못한다.'는 것에 공감했던 적이 있다. 나도 한국인이지만 나의 문화에 우리나라의 예술에 무식했기 때문에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살았지만 한국문화와 예술에 해박한 유선생은 우리나라의 강토를 보물덩어리로 소개한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가장 잘 아는 듯하면서도 가장 몰랐던 예수가 바로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시는 장면이다.
두 번째로 이들은 감성이 없는 지식공간의 세계에서 주님을 만나고 있었다.
이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주님 그 분 자신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경험한 예수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에서 만난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제 영원히 변하지 않고 실존적인 실체의 모습으로 이들에게 다가가신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변형은 경험되어졌던 주님의 모습과 같은 분이시면서도 영원한 실존자로 이 세계에 나타나셨기 때문에 이들이 알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출애굽 사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 대 민족적인 합창을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렸지만 마라에서 쓴 물을 마시게 하심으로 감성에서 이성으로의 전이를 유도하셨던 하나님의 의도를 볼 수 있다. 이들이 나중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때 예수께서 성경을 풀어 설명하실 때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자신들의 경험을 돌이키는 장면이 나온다. 마음에 무엇인가 뜨겁게 와 닿았던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가지는 경험과 지식으로 구성되어있는 이성적 세계에서 감성으로의 전이가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깨달음이 없는 지식은 그 속에 조개가 껍질을 벗고 나가고 남긴 조개껍질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는 신앙인들에게는 말씀이 공허한 지식이 되는 세계가 아닌 말씀 속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며 숨 쉬는 도성인신의 진리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진리가 없었던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디에 태어났다는 소리를 들어도 베들레헴에 찾아가 경배하지 않았고 강도 만난 유대인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면서도 이것이 전혀 신앙적인 모순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우리 주님은 머리로나 가슴으로가 아닌 온 몸으로 알아 가야 한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결국 더 가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을 억지로 만류하고 초대하여 식사를 같이 나눔으로 그가 축사하실 때에야 주님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죽음을 보고 실망하여 입술로는 주님에 대해 말을 하면서도 발걸음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향하여 가던 이들이 주님을 만나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 속에 예수의 오심과 가심에 대한 예언이 정확하게 이루어졌음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지며 주님을 모신 식탁에 앉아 주님의 축복을 받을 때 비로소 이들의 경험과 지식 속에 죽었던 예수가 이들의 삶 가운데 다시 살아나셔서 만나고 계심을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주님께서 이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왜 직접적으로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던 너희들이 그렇게 찾던 예수다.' 라고 밝히지 않으시고 이들에게 먼저 말씀을 풀어 알리시고 이들을 식탁에서 축사하심으로 이들의 영적인 눈을 밝히셨을까?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 분이다. 즉 우리가 보겠다고 해서 보이는 것이 아닌 주님이 원하실 때 우리에게 보이시는 분이시다. 또한 손으로 만지는 분이 아닌 마음으로만 느끼는 분이 아닌 온 몸으로 알게 되는 전인적인 삶의 동행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마음으로 느끼는 것은 예수의 일부분일 뿐 전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찾는 예수는 눈으로 보이는 곳에 계시는 분이 아니며 글을 읽고 지식을 쌓아 견문을 넓히는 철학의 세계에 계시는 분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삶을 외로이 하여 홀로 주님을 찾는 자를 찾으시고 마음에 간절히 바라고 사모하는 자를 만나시며 주님과 동고동락하기를 원하는 자와 함께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입술은 거룩한 것을 말하나 발걸음은 여전히 세상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은 왜일까?
런던영광교회 안병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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